뮌헨 참사 또는 뮌헨 학살(Munich massacre)은 1972 뮌헨 올림픽 기간에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서독으로 침투한 후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 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건이다. 범인들은 모두 사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서독 경찰의 진압 실패로 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진의 위령비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건물에 설치되어 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테러에 대한 자세한 정보, 희생자 개개인의 사연, 그리고 당시 사진을 보여주는 빔 프로젝터가 설치된 야외 추모관도 존재하며 조화가 놓이고 있다.
당시 미흡했던 서독과 이스라엘의 보안
서독은 뮌헨 올림픽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에서 벗어나 밝고 진일보한 독일 사회를 보여주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선수단의 올림픽 참여는 차별과 폭력의 그림자를 단절하고 싶었던 서독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서독 정부는 세계 평화를 올림픽의 주제로 내세우고자 의도적으로 행사의 보안을 최소화했고 그 결과 뮌헨 올림픽 보안에 배정된 비용은 200만 달러에 불과 했으며 선수촌이나 경기장 어디에도 무장경찰이나 보안요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하늘색 복장을 한 ‘올리스’라는 이름의 진행요원들이 보안과 교통 통제를 담당하였으며 올림픽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태도 역시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선수촌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너무 낮아 보안에 취약했다. 선수들은 담장을 쉽게 뛰어넘어 맥줏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이스라엘 선수단도 충분한 보안 대책을 갖추지 못했다.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보안담당자는 선수단에게 이목을 끌지 말고 수상한 가방을 열어보지 말라는 등 원칙적인 보안 지침만 안내하였다. 대표선수들, 코치와 심판들, 기자와 방송요원들은 선수촌의 열악한 보안을 우려하였으나 추가적인 조치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보안의 해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올림픽에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군정보부 제4국은 유럽에서의 테러가 임박했다는 첩보를 다수 입수하였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제시되지 않았고 다수의 보고서는 국제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려오는 부정확한 경보로 치부되었다.
당시 사건의 내용
9월 5일 새벽 4시 10분 두 그룹의 검은 9월단 침투조를 태운 택시가 선수촌 25A 게이트 옆 담벼락에 도착했다. 올림픽 공식 체육복을 입은 그들은 새벽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몰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월담을 시도하는 선수들처럼 보였다. 심지어 침투조 중 하나는 담을 넘던 중 술 취한 캐나다 선수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겹게 서로의 월담을 도와주었으며 얼마간 걷다가 곧 헤어졌다. 선수촌을 가로지르던 테러리스트들을 독일 우체부들이 목격하고 본부에 신고하기까지 했으나 서독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콘놀리가 31번지에 도착한 그들은 매고 있던 올림픽 공식 더플백에서 AK-47 소총을 꺼내 일제히 장전했다.
이스라엘 남자 선수단에 배정된 아파트는 총 다섯 동이었다. 1동은 코치와 심판들이 묵었으며 2동은 사격, 펜싱, 육상 선수들이, 3동은 역도와 레슬링 선수들이 쓰고 있었다. 4동에는 팀 닥터가, 5동에는 선수단장 랄킨이 있었다. 여자 선수들은 다른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조정 선수 2명은 경기가 열리는 독일 북부 킬에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문이 열려 있었던 1동 로비를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는데 복사된 열쇠를 가지고 여러 열쇠를 돌려 가며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국제 레슬링 심판 ‘요세프 구트프로인트’가 잠에서 깨 숙소 안에서 문 옆으로 다가갔다. 출입문이 열리자 ‘구트프로인트’는 즉시 상황을 인지하고 거구의 덩치로 문을 막았는데 동료들의 탈출을 위해 최대한 문을 밀어붙이고 버텼으나 오직 역도 코치 ‘투비아 스콜스키’만 탈출에 성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스콜스키는 직감적으로 뒷편의 이중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져 달아났다.
스콜스키가 무작정 도망쳐 향한 곳은 한국 선수단 숙소였다. 당시 한국 여자배구 코치 전호관은 새벽 5시 20분경 누군가 마구 숙소 문을 두들겼고 처음에는 취객인 줄 알았고 항의했으나 곧 남자가 자신이 이스라엘 역도 코치라고 설명했다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스콜스키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곤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숙소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전호관 코치는 즉시 경찰에 연락했으며 10분 뒤 서독 경찰이 와서 스콜스키를 보호했다.# 스콜스키는 1동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구트프로인트를 제압한 테러리스트들은 1동에서 잡은 인질 6명을 2층으로 데려가 밧줄로 묶었다. 1동 안에는 구트프로인트 말고도 5명이 잠들어 있었다. 비몽사몽이었던 다른 4명과 달리 친구들과 늦게까지 뮌헨을 즐기고 온 레슬링 코치 모셰 바인베르그는 테러 지휘자 이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지만 그의 총을 빼앗으려는 순간 다른 테러리스트가 그에게 총을 쐈다. 총알은 그의 오른쪽 뺨을 관통했고 테러리스트들은 제압된 인질들을 모두 2층 방에 몰아넣었다.
테러범 이샤와 토니는 두 조로 나뉘어 행동을 진행했다. 이샤와 2명은 1동의 인질들을 관리하고 토니와 다른 4명은 바인베르그를 끌고 나와 이스라엘 선수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를 강요했다. 바인베르그는 2동을 지나쳐 3동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아마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역도 선수들과 레슬링 선수들이 테러범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3동의 선수 5명은 총을 든 테러범들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역도 선수 다비드 베르게르가 반격을 시도했으나 곧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했다. 토니 일행은 플라이급 레슬링 선수 가드 차바리를 선두에 세워 인질들을 1동으로 데려갔다. 1동 로비 앞에 도착한 순간 차바리는 테러리스트의 총을 후려치고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해 주차장으로 뛰어내려갔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차바리의 탈출과 함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바인베르그는 근처 테러리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러리스트는 반사적으로 총을 발포했고 바인베르그의 죽음과 함께 길게 울려퍼진 총성은 선수촌 전체를 깨웠다. 이렇게 10명의 이스라엘 선수단 인질이 1동에 감금되었다.
오전 4시 50분경 사태를 인지한 올림픽 본부 측에서 내보낸 진행 요원이 1동 앞에 도착했다. 진행요원은 바인베르그의 시체와 로비를 지키고 있는 테러리스트를 발견했다. 그는 본부에 상황을 설명했으며 같은 시간 이스라엘 선수단장 랄킨은 급히 이스라엘 기자들이 묵는 호텔로 전화를 걸어 인질극이 발생했다고 외쳤다.
한편 1동에서는 레슬링 선수 요세프 로마노가 바인베르그의 죽음을 보고도 테러리스트에게 달려들려고 시도했는데 한 명을 바닥에 쓰러뜨렸으나 다른 테러리스트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 로마노의 시체는 거실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과 같은 공산주의 단체 바더 마인호프의 두 리더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서독 경찰이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올림픽 주최측은 이 소식을 들은 후에도 한동안 경기를 지속했다가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나서야 모든 경기를 중단했다.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었다. 추축국이었던 과거로 인해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후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트 슈라이버 총경(1926~2015)이 현장 총책임자가 되었다. 슈라이버는 일반적인 경찰 업무는 잘 한다는 평을 들었지만 인질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욱이 사건 발생 1년 전인 1971년 8월 4일에 일어났던 은행강도 인질극에서 불확실한 대처로 인질 1명이 사망하여 기소당한 전적도 있었다. 슈라이버가 현장을 지휘하면서 여러 문제가 터져나왔다. 사건 발생 후 인질극이 벌어진 선수촌 주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기자와 구경꾼들이 주변을 가득 메웠으며 심지어 방송국에서는 아예 카메라로 생중계를 하는 바람에 테러범들은 경찰의 행동 하나하나를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해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출동한 이들은 특수부대가 아닌 평범한 일선 경찰관들이었다. 당시 테러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내에서 사격을 잘하는 사람을 찾길래 지원했더니 이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격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그 작전이라는 것이 고작 운동선수로 위장한 경찰들이 스포츠 가방에 무기를 숨겨서 테러범들이 점거한 숙소 맞은편 건물의 옥상으로 잠입해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허술하게도 매우 두꺼운 방탄복 위에 체육복 상의를 걸쳐 입은 것이 뻔히 드러나는 복장으로 잠입을 시도했고 현장의 언론통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테러 진압 작전 준비 모습을 방송국 카메라가 모두 담은 것이다. 그 바람에 TV 뉴스로 이 광경을 본 테러범 중 한 명이 테라스로 나와 위장 경찰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상부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24시간 안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요구해서 인질들과 함께 비행기로 중동으로 가기로 명령받았기 때문에 헬리콥터를 요구했다. 처음 이들이 요구하던 나라는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 측 협조를 받고자 이집트 대사관에 전화했지만 당연히 이집트 대사는 기막혀하며 “테러범을 왜 우리 이집트에 들여놓으라는 겁니까? 폭탄돌리기인가요?”라고 어이없어 하며 거절했다.
사실 서독은 테러범들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서독 경찰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에는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 놓고 외부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테러범들을 사살하려고 했지만 비행기의 경찰들이 겁을 먹고 헬리콥터가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독단적으로 작전을 취소한 뒤 철수했다.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수투표를 했고 이후 모두 비행기에서 도망갔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작전 시행 30분 전까지도 독일 경찰은 테러범 숫자를 5명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8명이었지만 올림픽 선수촌에서 인질의 상태를 확인하러 간 IOC 위원이 “테러범 5명을 봤다”고 말한 것을 검증도 없이 믿었고 나중에 테러범들이 이동하는 헬리콥터에서 테러범이 8명이라는 소식을 전해오고 나서야 정확한 인원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미 작전에 들어간 경찰관들에게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착륙한 후 테러리스트들이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 테러범들을 전부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서독 경찰 1명이 순직했으며 테러범들이 탄 헬리콥터에 수류탄을 던져서 헬리콥터가 폭발하고 다른 헬리콥터에는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중 나중에 온 경찰들이 헬리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저격수와 도망쳐 온 헬리콥터 조종사를 오인사격해서 중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에서는 테러범이 8명이라는 사실이 전달되지 않아 경찰에 5명을 사살한 뒤 한숨을 돌리는 사이 살아있던 테러범 3명이 인질을 모두 학살한 것으로 설명했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가 인질 사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 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과 함께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IOC와 독일 정부는 대회 재개를 결정하였다.
나치즘의 선전장이 되었던 베를린 올림픽의 기억을 딛고 독일 부흥을 상징하는 가장 화려한 대회를 만들겠다는 서독의 결심은 이 사건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72 뮌헨 올림픽은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한편 테러범 8명 중 5명은 총격전 중에 사살되었고 남은 3명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테러범들은 루프트한자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2명은 모처에서 의문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의 죽음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유력하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을 피해 지하 생활을 하고 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의 보도(한국어 번역)에 따르면 뮌헨 올림픽 참사가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테러리스트들은 네오 나치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묘사되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네오 나치 간의 커넥션이 형성되는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영논리와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극한을 보여준 사례다.
검은 9월단이 PLO 중에서도 극좌공산주의 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네오 나치-공산주의 연합이라는 정신나간 조합이 왜 이뤄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냉전기 서유럽의 네오 나치는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서유럽을 약화시키려는 소련 및 동독의 숨은 의도였고 다른 하나는 네오 나치들이 기성 나치가 쓸려나가고 오토 에른스트 레머를 비롯한 정통 신나치주의자들도 줄줄이 정부의 탄압을 받다가 슈트라서주의 위주로 뭉쳤는데 슈트라서주의자들이 나치당 중에서도 좌파 세력이라 소련과 동독을 적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이 소식을 듣고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쿠르트 발트하임에게 “뮌헨에서 열린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 학살에 박수를 보냅니다. 히틀러가 600만 이상의 유대인을 태웠던 독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모든 이스라엘인을 유대 국가를 만든 죄를 지은 영국으로 보낼 것입니다.“라는 전보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이 전보를 접한 발트하임은 UN 대변인을 통해 “정부 수뇌들이 그에게 보낸 전보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사무총장의 관례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전했고 아민을 비판하지 않았다.
참사에 대한 대응 실패 원인
뮌헨 올림픽이 개최된 시기는 68운동의 대두와 데탕트 기류의 시작으로 냉전이 다소 완화되었을 때였으며 오늘날처럼 고도의 장비와 전문 인력을 갖춘 테러리즘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한 마디로 당시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큰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올림픽으로 인한 혼란, 정보 부족 및 수집 장애도 큰 원인이었다.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하지 못하고 테러범들과 교섭하러 테러범들의 거처를 방문한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했다. 진압 작전에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라며 당황했고 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이 독일이니 독일이 맡아야 할지, 인질이 이스라엘인이니 이스라엘이 맡아야 할지, 테러범이 팔레스타인 계열이니 팔레스타인의 협조를 얻어야 할지 등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경찰 진압부대가 테러리스트들을 멀리서 정확하게 제압할 만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문 대테러부대 같은 조직이 없었던 탓에 범인을 초반에 제압하지 못하면서 피해가 이어졌다. 사건의 경과를 보면 어이없으리만치 황당한 대처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뤄지는 민간인 상대 인질극은 벌어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테러 전문팀이나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었다. 계획대로라면 경찰 저격수들이 공항에서 테러범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저격수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아니라 그냥 사격이 취미였던 일반 경찰들이었다. 독일군에는 저격수가 있었으나 법적으로 독일군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된 H&K G3 소총에는 스코프도 없었다. 경찰 중에 총 좀 쏜다는 몇 명을 차출해서 무작정 군용 소총을 쥐어주고 테러범을 저격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재앙은 예견된 것이었다. 심지어 당시 뮌헨 경찰에게는 보다 뛰어난 저격용 소총인 SSG 69가 있었는데도 G3 소총을 쥐어줬다.
테러범이 비행장에 도착한 시각은 어두운 한밤중이었는데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헬리콥터가 활주로 조명이 들지 않는 곳에 착륙했다. 그에 더해 착륙 방향이 저격수들을 상대로 90도 가량 직각이어서 시야에 모든 테러범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라도 이런 일이 터졌다면 대개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외려 이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으로 테러 대응을 인식하는 것이 늦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인류 역사에서 당하기 전에 사건 사고를 대응한 사례보다 당해서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고치거나 대응한 사례가 더 많듯이. 사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에서 이런 유혈 인질극과 같은 테러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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